서로의 무게
현오 X 현우
롯 쓰고 사랑함
1
“차기 가주….”
“압니다.”
재촉하려 드는 최기사의 입을 먼저 막아 버렸다. 내가 몇 분이나 시트에 파묻혀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도 마음이 타는 모양이었다. 탁탁,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그의 손가락이 핸들에 부딪혔다. 듣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가벼운 소리가 좁은 차 안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LP판이 튀는 것 같은 묘한 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편안한 가죽 시트에 몸을 푹 파묻었다.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등이 푹 잡아당겨져 꺾였다. 그리고 비가 죽죽 그어지고 있는 차창 너머로 흘긋 눈길을 올렸다. 짙게 썬팅이 된 차 유리 너머로 높은 담에 둘러싸인 고급스러운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낮게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처소.
현무 가의 본가였다.
내가 소속된 곳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오는 곳.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발을 들일 것이라고는 전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나 자신을 증오하는 만큼 현무 가를 증오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고, 그 결과 '차기 가주'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달고 이곳에 다시 오게 된 것이다. 그 무게를 짊어진 순간 다리가 휙 꺾이고 휘청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차기'라는 단어가 빠지고 납으로 만들어진 죽음의 왕관을 쓰게 된다면, 그 무게에 나는 무릎과 허리가 동시에 꺾이고 고개 들어 앞을 보는 것 조차 어려워 질 것이다. 한숨을 참으며 짙은 창문 너머의 현무 가를 노려보았다. 밝은 색이라고는 없이, 죄 어두운 색으로 칠해져 있는 담장과 지붕이 나를 벌써부터 옥죄고 억눌렀다. 그 와중에도 최기사의 초조한 마찰음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다섯 까지만 속으로 세고 일어나기로 결정했다.
하나. 나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둘. 아니, 실은 누구보다 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셋. 여기서 나는 봐야 할 사람이 있다.
넷,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다섯, 내 아버지.
***
조심스레 나를 안내하는 앳된 얼굴의 여시종은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댕기를 흔들며 걸었다. 정갈하게 땋아 내린, 마치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타래가 흔들리는 것이 퍽이나 고왔다. 연분홍색의 버선이 녹색의 비단 한복 치마가 들릴 때마다 사르륵,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하얀 발목이 보일 듯 말듯, 보석처럼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는 버선에 까지도 세밀하게 현무의 상징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보고 벌써부터 질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뼈까지 박박 긁어 사용한 후에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내칠 부속품인데도 영원히 제 것임을 표식을 새기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현무 가의 상징을 박아 넣어 놓는다는 것이 우습지도 않았다.
복숭아뼈가 채 보이지 않는 길이의 한복.
한복은 단정하면서도 야릇한 맛이 있는 의복이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복숭아뼈를 따라 정신 없이 걷다 보니 어두운 복도가 끝나고, 화려하게 현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원목의 문이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어주고,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정중히 미소를 보인 시종은 꼭 없었던 사람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금세 어둠이 그녀를 다시는 뱉지 않을 것처럼 삼켰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쳐다볼 새도 없이, 커다란 문이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열리면서 검고 화려한 공간이 시선을 빼앗았다. 눈앞에 드러난 공간은 누가 현무 가 아니랄까봐, 큼직한 현무 조각이 잡아먹을 것처럼 도사리고 있었으며 금과 흑석으로 세련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안은 가로로 넓었고, 꼭 그만큼의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차기 가주 아니십니까. 기다렸습니다.”
중앙의 화려한 의자에서 우아한 웃음을 지으며, 중년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펄럭이는 고급 비단의 검은 도포 끝자락에는 금색 실로 현무가 수놓아져 있었다. 어딜 가도 현무의 손아귀인 곳이다.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혐오감을 누르고 겨우 대꾸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본가를 처음 오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여실히 비웃음이 깔려 있는 남자의 목소리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신들이 선택한 가주가 아니니 얼마나 아니꼬울까. 내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남자는 꼭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분 나빠할 틈새도 없이, 남자는 뱀처럼 쉿쉿 거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의 뒤로 또 하나의 검은 문이 열렸다. 놀라지 않으려 애썼지만, 열려진 공간은 현실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 속으로 기함을 토했다. 지금의 방도 충분히 호화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열려진 방은 세 배로 넓은 공간이었다. 가로로 넓었던 만큼, 아니 그 곱절로, 세로로 길어졌다. 그 안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다. 금색 술이 달려 있는 검은 비단이 깔려 있는 바닥과, 금으로 뱀과 거북이가 얽혀 조각되어 있는 벽, 비단 창호와 호롱불.
그리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많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과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서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찾으려 애쓴다면 나에 대한 경멸 정도일까. 물론 그 경멸을 바라고 온 것이니 나는 그것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 경멸 어린 시선에 머리꼭지까지 오싹하게, 만족으로 소름이 돋았다.
“자리에, 오르시지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려진 벽 너머로, 순금으로 현무가 조각된 번쩍거리는 검은색 의자가 보였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무거운 자리. 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주가 되기 위해 왔지만 그 위압감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보처럼 있을 수는 없지.
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도 깨물고 헤집어 대서 입술 안쪽이 시렸다. 자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자리를 향해 긴 복도를 걸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버러지 같은 인생들. 나는 친히 이 버러지들의 왕이자 방패막이, 꼭두각시가 되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다. 가까워질수록 의자는 점점 커졌다. 바로 앞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여기 앉으면 돌이킬 수 없다. 절대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고, 죽을 때까지 이 담장 밖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눈을 감았다. 단지 명예나 돈을 위해서였다면, 절대 앉지 않았을 면류관의 의자다. 내 무른 이마를 꽉 누르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길, 그런 가시가 돋아 있는 의자. 하지만 나는 목적이 있었다. 절대 그런 시시한 이유 때문에 내 스스로 목을 걸 매듭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몸을 돌려, 천천히 앉았다.
앉아서 다리를 꼬자마자, 버러지들의 찬송이 들렸다.
“감축 드립니다, 가주.”
이제 '차기' 가주가 아닌 가주. 나는 이제 어엿한 현무 가의 주인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언어의 바뀜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척추를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만족감과, 동시에 치솟는 자기 혐오를 감추려 겹쳤던 다리를 풀고 다시 왼다리를 꼬아 앉았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만든 내 인생이다. 그 안에서 열심히 춤을 춰주겠다.
“이제부터 나는.”
어두운 공간엔 빛이 하나도 없었다.
“이곳의 주인입니다.”
자꾸만 속으로 먹히는 목소리를 겨우 뱉었다. 내 말에 나를 안내한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지당한 말씀이지요. 하고 다시 또 연극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을 필두로 수많은 자들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하나하나의 머리를 밟고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숙여진 고개 위에서 나는 비틀거릴지언정 밟고 서 있었다. 그제서야 겨우 숨을 몰아 쉬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쨍-하고 얼어있던 긴장된 공기를 깨뜨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도 들어가게 해 주세요.”
한참만의 정적을 깬 것은 앳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어딜 봐도 즐거운 구석이라곤 없는, 음침한 현무가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연약한 목소리에 출처를 찾으려 한 바퀴 휘 둘러 보다 방금 내가 들어온 문에 시선이 갔다. 그 곳에선 닫혀 있던 문이 열려 있고 똑같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서넛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워낙 조용하다 보니 조금만 소란스러워 졌을 뿐인데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에 낭패. 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방이 하도 넓고 길어, 끝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울려서 잘 들려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덩치 좋은 사내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 결국 몸을 벌떡 일으키자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몇몇의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막아섰다.
“가주.”
"왜요. 저한테 보이면 안 되는 현무 가의 비밀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가주. 인데요."
뼈있는 말에 나를 막아섰던 남자가 억지로 일그러지는 웃음을 지었다. 어떠한 감정을 숨기려 억지로 웃은 모양인데, 원체 웃지 않는 얼굴이었던지 그 모습은 마치 일본 가면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혐오스러운 모습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똑바로 웃어준 후, 남자를 밀치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누구신데 이리 소란을,”
어린 소년의 얼굴을 마주 대한 순간, 나는 내가 현무 가에 온 이유를 형형하게 떠올려 낸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악마가 그대로 들어온 듯, 나와 꼭 닮은 새카만 눈동자와 머리칼, 창백하기 까지 한 얼굴. 나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내가 이 늪에 발을 들인 이유였다.
내
아
버
지
2
현무 가는 추악한 비밀이 있다. 현무의 기운은 비정상적으로 센 음기라, 여자가 그 기운을 품어 제대로 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차기 가주는 나타난다. 비밀은 간단하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주술의 힘을 빌린 것이다. 각 가주의 피를 이어 받은 자는 두 명이 태어난다. 한 명은 주술과 징표를, 또 한 명은 징표만 가지고 태어난다. 징표만 가지고 태어난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현무 가의 씨받이 노릇을 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현무의 음기를 겨우 버텨내고 아이만을 품어내는 그런 용도로. 현무 가의 징표만 가지고 태어날 뿐 그를 이길 주술이 없는 그는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씨받이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주술로 태어나자마자 몇 년 안에 다른 사람이 15년 정도 자랄 것을 급속 성장을 시킨다. 그렇게 탄생한,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백치는 현무 가의 사람들에게, 대를 잇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되다가 아기를 낳고 나면 살해당한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외부에서 보는 현무 가의 '고귀한 이미지'를 지키려는 자들은 그 백치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는 절대 안채에서 나가지도 못한다. 그에게 세상은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안채와 작은 정원, 그리고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아 있는 차가운 담이 다였다. 햇살과 바람마저도 멈추고 고여서 썩어가는 것만 같은 그 우울한 공간에서, 얼마 안 되는 짧은 생애 동안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천천히 생명을 뺏겨 죽어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형적이고, 우울하며, 불쌍하고, 역겨운 삶.
그렇게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 중 가장 우수한 아이는 가주가 된다. 곧 말라 비틀어질 배덕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롯한 여러 가주 후계자들은 모두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차기 가주로 선택된 자는 살아남아 본가로 들어오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현무 가는 죽이거나, 혹은 죽는 것이다.
유일하게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신을 죽여 생명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생명을 만든다는 자각조차 없다. 나는 이 추악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나의 아버지 -물론 그가 아버지라고 지당하게 불릴 수 있는 존재라면 -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빌어먹을 삶을 주었는지, 당신은 얼마나 엿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을 내 손으로 끝낼 것을 염원했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 부정을 위해서는 뿌리까지 불태워 없애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현무 가에게서 선택 받은 차기 가주들을 모두 죽이고 억지로 차기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아버지가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한 명 한 명 차례차례 죽이고, 결국 나 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나는 아등바등 이 길을 걸어왔다.
“어, 현오 공자!”
달빛이 유독 밝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청을 걷던 나는 회색 비단 한복을 입고 조용히 웃으며 나를 부르는 내 아버지를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아들인 것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이만 먹어 -그렇다고 해 봤자 채 10년도 되지 않지만 - 도덕도, 사회성도, 상식도 없는 백치인 그의 이름은 현우였다. 그와 얼굴과 이름까지도 닮아 있는 나는 이 자가 낳은 마지막 아들이었다.
가주에 오른 날 보고 나서 한 달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가주가 생겼으니 이제 그는 씨받이로써의 역할을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그는 천천히, 그리고 지루하게 현무 가의 높은 담장에서 죽어가는 일만 남은 껍데기다. 상념에 빠진 나를 현우가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에 달이 비춰, 속눈썹이 연약한 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검은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은 그 처연한 껍데기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어색하게 돌렸다.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 때문에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누르고 그의 이름을 어색하게 입에서 불러냈다. 현우, 라는 나와 끔찍하게도 비슷한 이름이 입안에서 강간당하듯이 이빨과 혀에 부딪혔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힘겹게 그의 이름이 내 입 밖으로 굴러 나왔다.
“현우 공…자, 뭐하십니까, 여기서.”
칭호가 마땅치 않아 그가 날 부르는 것처럼 공자, 하고 불렀지만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껄끄러워 중간에 말이 끊겼다. 과연 내가 그를 '공자'라 불러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부름에 그는 멋쩍게 웃고는 발을 흔들던 박자를 빨리 했다. 안채에서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그인데, 게다가 왠지 모든 것이 속박되어 있는 것 같은 새벽에 대청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왠지 나도 죄짓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속삭이는 말투를 냈다.
그는 해맑게 웃으면서 나에게로 손짓했다. 잠시 고민하다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는 가까이 다가온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창백한 입술에 검지를 대고 쉿-하고 속삭였다. 전혀 흑심이 없는 순진한 손길이었지만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야했다. -오히려 그에게는 흑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야한 것 일수도 있겠다.
“비밀로 해주면 안 돼요?”
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잽싸게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앉히려 애썼다.
“현오 공자도 여기 앉아서 봐요.”
“저는…아닙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용인들에게는 말하지 않겠으니,”
“나랑, 같이 봐주면 안 돼요?”
나를 올려다보는 반질거리는 눈동자. 그의 검은 머리칼 뒤로 하얀 달빛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도 모르게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떴다. 눈 뒤 깊은 곳에서 삐쭉 하고 배덕이 나를 찔렀다. 내 손을 잡은 차가운 손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 있다 가겠습니다.”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옆에 털썩, 주저앉자 그제서야 그는 맑은 웃음을 띄웠다. 그 웃음은 현무 가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종류의 청량한 것이었다. 짙은 눈썹과 눈매가 아래로 떨어져 곡선을 그리고, 색깔 없는 입술이 그와 반대된 모양으로 휘어지는 그런 웃음. 나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을 확 빼어 냈다. 물리쳐진 손을, 그는 계면쩍은 얼굴로 비비적거렸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내가 겨우 정적을 깨려 입을 열었다.
“들키시면 어쩌시려고 나오셨습니까.”
“달님이 너무 예뻐서요..”
그의 대답이 의외의 것이어서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파악하려 그의 표정을 관찰했지만, 솔직한 감정이 얇게 동동 떠올라 있는 얼굴은 전혀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그가 머무르고 있는 안채는 나무가 유달리 많아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달이 어지간히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몸은 십대를 넘어섰지만 정신은 아직 미취학 아동에 머무는 그라서 말투도, 사용하는 단어도 모두 여전히 어린 아이 같았다. 달빛에 흠뻑 젖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 하얗고 조그만 얼굴은 배덕과 성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크흠, 하고 뜻 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달님이 참 예쁘지요, 현오 공자? 공자, 이건 비밀인데….”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말할 것처럼 나를 손짓으로 불러 귓가에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런 향도 없지만 달뜬 숨이 귓가에 휙 스쳤다.
“-달님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답니다.”
“….그렇군요.”
“빨리 빌어요. 공자도.”
그러더니 손을 마주 모아 눈을 감는다. 은행잎처럼 넓게 퍼진 속눈썹은 꼭 쓸어보고 싶을 정도로 보드라워 보였다. 그 속눈썹은 마치 무언가를 감추려 하는 휘장 같았다. 양갓집 규수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내린, 어딘가 야하게 느껴지는 휘장. 입도 꼭 다문 채로 퍽 진지하게 소원을 빌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볼에는 밤하늘과 달빛이 앞을 다투어 입을 맞추고 있었고, 잘 때마다 푸르고 땋는 검은 머리칼은 조신하게 앞으로 내려와 있었다.
입 맞추고 싶다.
본능적으로 떠올린 생각과 그와 함께 떠오르는 배덕에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둘 다 무시할 수는 없는 강력한 것이었고 내 이성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이기지 못할 만큼 유약했다. 결국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볼로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을 때,
“공자는 소원 뭐….”
기도를 마친 그가 거짓말처럼 눈을 반짝 뜨고 웃음을 얼굴 가득 만들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입술 사이가 남았다. 서로의 뜨거운 숨이 공중에 흩어졌다.
“…공자.”
“쉿….”
아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야하게 말했던 그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방금 까지 그 무엇보다 순수했을 소원을 빌던 작은 손을 꾹 누르고, 차례로 핏기 없는 입술을 눌렀다. 놀라 버벅거리는 혀를 강제로 끌어 타액을 나누고, 잇속의 얇고 연약한 부분을 끈질기게 애무했다. 헉, 하고 숨이 차오르는 듯 나를 밀어내려 자꾸만 고개를 떨궜지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내 손바닥 아래에 깔린 차가운 손이 자꾸만 바르작거려 이성의 한 부분을 툭 끊기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배덕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발 아래 에서 감돌던 그 파도가 내 머리끝까지 차올라 내 숨을 억세게 조르고 내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웠다. 다시는 수면으로 떠오를 수 없도록.
-이제 어떻게 되든 간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공자….”
한참 만에 입술을 떼자, 초옥-하고 부끄러운 소리와 함께 침이 길게 늘어났다. 괜스레 부끄러워지는 그것에 서둘러 입술을 닦아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순진한 눈을 마주대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도톰하게 부어올라 색깔을 연하게 띄운 입술을 마른 손가락으로 만지며 그가 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습니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정말로 씨받이였던 모양이다. 그를 거쳐 갔던 수많은 쓰레기 중에 조금이라도 다정한 자는 정말이지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왠지 억울하고 그가 안쓰러워져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주며 이마를 맞댔다.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길 몇 번을 반복했다. 어떤 말을 해야 방금 전 키스의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슨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의 다정한 사람이 되어 주겠단 뜻입니다.”
그 말에 현우는 나와 맞댄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그의 이마가 찡그려져서 눈이 저절로 들렸다. 눈썹이 휘어졌고 왠지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달빛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나는 레테 강을 건너고 있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속눈썹에 걸쳐지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뜨는 현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백치 같은 그가 내 말을 이해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3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의미가 무거운 개념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내 앞의 상대에서, 그리고 상대에 비친 나에게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아주 추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캄캄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흠을 찾으려 손톱을 잔뜩 세우고 긁어 내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의 생애도 이처럼 어두움 자체라고 생각했다.
깊은 늪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 쳐 왔는데 그 노력이 헛되게도, 등 뒤에 더 어둡고 큰 벽에 부딪혀서 날개가 꺾였다. 아직 마르지도 않은 날개가 무르고 그 자리에는 대신 어깨뼈가 빼죽하게 올라왔다. 내가 더 이상 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무릎을 꿇어 바라본 벽에는 현우가 웃으며 기대 서 있었다. 그의 차갑게 곱아 있는 손가락, 땋은 머리를 쉴새없이 만지작거리는 습관, 무언가 처음 듣는 단어에는 눈을 살짝 위로 치켜뜨는, 궁금하다는 표정.
내 날개를 부러뜨린 벽은 생각보다 달콤하고 포근했다.
“현우야.”
밤이 예쁘게도 내려앉은 안채의 문은 언제나 무겁게 닫혀 있었다. 닫힌 문 앞에서 그의 이름을 작게 부르면, 문 뒤에서 오도도 하고 종종거리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과 발걸음, 그가 뛸 때마다 펄럭이는 한복 소매까지 세세히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 잠시 웃음과 함께 기다리자, 안채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현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현오 공자!”
잔뜩 기쁨이 묻어 있는 얼굴과 목소리로 내 손을 답싹 잡았다. 어린 아이가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을 쥐는 것처럼 절박한 손은 닿을 때마다 오싹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배덕의 강에 잠겨 죽은 목숨이었다. 이왕 죽은 목숨이라면, 현우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는다면 그보다 기쁜 죽음이 없을 터였다.
“아직까지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현오 공자가 온다고 약속하셨는데 어찌 잠들 수 있습니까.”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현우가 오늘은 속세의 어떤 것을 가져오셨습니까, 하고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빼앗듯 가져가 열었다. 이 쯤 되면 그가 날 기다린 것인지 속세의 물건을 기다린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갈색 종이봉투 안에서 소소한 물건들을 바라보며 얼굴에 꽃이 피는 현우를 쳐다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즐거웠다. 뽑기와 여러 불량식품, 그리고 비눗방울을 하나하나 마른 잎 같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져보는, 현우의 고운 얼굴을 보며 나는 그의 방으로 발을 들였다. 현우는 털썩 이부자리에 앉았다.
그의 방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고 언제나 눅눅했다. 항상 펴져 있는 이부자리는 그의 생애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일방적인 폭력과 강간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존재였지만 현우는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이불에 편하게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종이봉투를 거꾸로 잡고 탈탈 털어냈다. 비눗방울을 들어 올리고 뭐에요, 하고 묻는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춰주고 열어서 후, 불어주었다.
멍하게 비눗방울에 손가락을 댄 현우가 베시시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펑, 터져버린 비눗방울에 웃음이 흐려졌지만 이내 불어주는 비눗방울에 웃음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 웃음에서부터 방은 화하게 밝아졌다. 하루 온 종일 나를 조여 대던 어두운 공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공간으로 향하는 들임은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배덕의 발걸음이기도 했다.
“해봐요.”
나에게서 비눗방울을 받은 현우가 빛나는 눈동자로 내가 했던 것 마냥 똑같이 불어냈다. 입술이 하트 모양으로 귀엽게 모아졌다. 반들거리는 빛이 나는 것이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가져오는 소소한 속세의 물건들이 모두 신기한 현우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참 곱습니다.”
“비눗방울이라는 겁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현우가 한 번 더 비눗방울을 불어냈다. 둥실둥실 위로 떠오르다 팡 터지는 유약한 방울이 꼭 현우 같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고,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그런 처연한 아름다움. 외부에서 손가락을 대어도 터지고, 높이 올라갈라 치면 스스로 터져버리는 그런 유약함이 현우와 꼭 닮아 있었다. 감성에 젖은 나를 옆에 두고 현우는 방싯방싯 웃으면서 몇 번이나 비눗방울을 불어댔다.
“오늘은 뭐하셨어요?”
“제가 뭐, 특별할 거 있겠습니까. 일어나서 산책하고, 그냥….”
현우가 드디어 비눗방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힘없이 웃었다.
“현오 공자 기다렸지요.”
그리곤 별 거 아니라는 듯 다시 비눗방울을 불었다. 입술이 모아졌다 흩어졌다. 담담한 현우의 말투가 진절머리 날 정도로 침착했다. 현우의 애달픈 표정이 슬퍼서 비눗방울을 잡은 현우의 손목을 감싸 쥐고 내렸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속으로 넘실대는 질문과 나 자신에 대한 타박은 겨우 삼키고 현우의 손목을 들어 살짝 입을 맞췄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하고 애정 넘치는 표현이었다. 지워지지 않을 길쭉한 상처가 손등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나 있었다. 그의 몸에는 이것 말고도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 벗겨보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옷을 입고서도 드러나는 발목, 종아리, 손목, 뒷목 전부 상처투성이었다. 무거운 색의 한복 아래에는 더욱 흉칙한, 수많은 상처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의 상처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한 가득 이었다. 내가 이곳에 없었던, 내가 가주가 아니던 그 시간 동안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천천히 현우의 옷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나는 곳 까지 열심히 입을 맞추자 현우가 거의 고꾸라진 내 머리 위에 반대편 손을 올렸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현우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현우는 내 죄를 모두 사해줄 것처럼 웃고 있었다.
“현오 공자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건 하나도 슬프거나 힘들지 않아요.”
참으로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현우가 고마워서 희미하게 웃었더니 현우가 만개하는 꽃처럼 웃었다. 이제서야 웃는다. 하고 현우가 내 입꼬리를 꾹 눌렀다.
“이제 기다릴 사람이 생겼으니, 기다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현우는 다시 비눗방울을 가져다가 불었다. 내 앞에서 둥실둥실 떠오른 비눗방울이 퐁, 하고 터졌다. 짧은 무지개가 함께 터졌다. 눈앞에서 튀는 비눗물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곧 현우의 차갑고 작은 손이 다가와 내 눈썹 부근에 묻은 비눗물을 닦아 주었다. 시야에 내려왔던 장막이 걷히는 것만 같았다.
4
“그럼 이 건은 마무리 하겠습니다.”
피곤한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면서 남자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서류들과 복잡한 이해관계, 거액의 돈에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달겨드는 현무 가는 도무지 정이 갈래야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시계를 흘끗 스치니 벌써 저녁을 넘어선 밤이다. 현우와 약속을 한 터라 마음이 초조했다. 서류철을 건네받은 남자는 나가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발뒤꿈치를 탁, 소리 나게 부딪혔다.
“그런데 가주,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뱀처럼 쉿쉿 거리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뭡니까, 하고 짤막하게 대꾸하니 그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바깥으로 까진 입술이 묘하게 올려 붙는 광경은 정말이지 눈뜨고 봐주기는 힘든 추한 것이었다.
“최근 현무 가의 쓰레기와 가주가 붙어먹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처신을 잘 하셔야 할 듯 싶은데.”
“쓰레기요?”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현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느새, 서로 이름까지 부르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나 봅니다.”
남자의 놀리는 어투에 화가 차올랐다. 목 너머로 쏘아붙이고 싶은 욕설을 참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란 단어가 꺼끌거려 차마 목에서 바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를 아버지로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세상 어떤 아들과 아버지가 이토록 부정하고 배덕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런 그를 쓰레기라고 거론하다니요.”
“현무 가에서는 그렇게 부릅니다.”
“듣고 싶지 않….”
“현무 가의 가주라면 현무 가를 따라야겠지요.”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묘하게 빛났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게 무릎을 펴고 어깨를 바로 하는 과정이 너무나 낯설었다. 일어서서 그를 쏘아보는데도 그는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만 흘려댔다.
“저는 가주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남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대단한 비밀을 말할 것처럼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속삭였다.
“그 수많은 경쟁자들을 죽이고 어렵게 이 자리에 올라오신 분이 아닙니까. 어렵게 올라온 만큼 자리를 열심히 지켜야겠지요?”
그럼, 하고는 정중하게 목례를 한 남자가 문을 닫고 떠나자마자 분에 못 이겨 서류와 책상을 뒤엎었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걷어찬 발이 욱신거렸다. 씩씩 거리는 숨이 잇사이로 뱉어졌다. 현우가 쓰레기, 라고 회자될 줄은 몰랐다. 이러나 저러나 그는 현무 가의 후계자를 낳은 이가 아닌가. 자신들의 검은 욕망을 억지로 현우에게 쑤셔 넣어 놓은 사람들이 누군데, 감히, 쓰레기라니.
눈이 뜨겁게 달아올라 머리 한 쪽이 쑤시듯 아팠다. 가주가 되고 나서부터 계속되는 편두통과 불면증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달은 발로 서재를 빙글빙글 돌며 목을 답답하게 죄고 있던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풀었다. 엄지손톱 밑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결국 엉망이 된 책상을 발로 한 번 더 괜히 걷어찼다. 머리가 아팠다. 바람을 쐬고 싶었고, 내 사랑을 보고 싶었다.
큼-하고 목을 가다듬어 시종을 불렀다.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처음 본가에 들어왔을 때 길을 안내해 주던 여시종이 엉망이 된 서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문을 열고 곱게 들어왔다. 머리채가 고개를 숙임에 따라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늦은 밤이지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잠시 후에 현우가 있는 별채로 다과를 들여 주세요. 너무 달지 않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시종이 종종 거리는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갔다. 깊은 한숨과 함께 허리를 숙여 엉망이 된 서류철을 집어 드는 것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질러진 서류만큼이나 엉망이 된 기분이었지만 현우를 볼 것에 천천히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추 정리가 되자 정장을 벗고 서재를 나섰다. 유달리 달이 어두운 밤이다.
***
“현ㅇ,...이게 뭐….”
“오셨어요, 현오 공자.”
미리 언질이라도 하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빨리 치울걸. 하고 현우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추슬렀다.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현우의 움직임을 멍하니 보고 있기만 했다. 내가 부탁한 다과는 한쪽으로 밀어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 펴진 이불에는 피와 정액이 말라붙어 얼룩져 있었다. 항상 정갈히 차려 입고 있던 검은 한복은 다 풀어헤쳐져 있었는데, 다리 사이와 가슴팍이 민망할 정도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리 사이로는 끈적한 불그스름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고 가슴팍은 멍처럼 순흔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다. 머리채도 엉망이었다.
“이게 무슨….”
“왜 그러십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현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도 잇지 못하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는 대강 옷을 추슬러 입었다. 나를 대하는 어떠한 태도에도 어색함과 부끄러움은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것이 괜찮은 척을 하거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자 발끝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무 가에서 현우를 씨받이 용도로만 사용하여 기본적인 도덕과 사회 관념이 결여 되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이런 것은..다정한 사람끼리만…하는 겁니다, 현우 공자.”
“왜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비틀거리는 현우의 허리를 잡아 앉히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현우의 옷고름을 정리해주었다. 왜요, 하고 순진하게 내 머리로 떨어지는 현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쉬어 있었다.
“현우 공….”
“제가 이런 걸 하면..현오 공자는 슬픕니까?”
현우가 금새 무너질 것 같은 연약한 표정을 하고 내 볼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이 얹어진 볼이 터질 것 처럼 달아올랐다.
“저를 보고 슬픈 표정을 짓는 현오 공자는 싫습니다….”
말끝을 흐린 현우가 내 입술에 꽃잎이 내려앉듯 입을 맞췄다. 말라붙은 그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것은 아무런 소리도 감흥도 없었다. 현우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떼어내곤 어물거렸다.
“.현오 공자는, 싫습니까? 이런 것.”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러난 마른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말하다가 키스를 당한 현우의 잇몸이 찢어져 피가 났다. 현우가 막힌 입 안으로 으응-하고 콧소리를 냈다. 쇠 맛이 역하게 올라오는 입맞춤이었다. 금방이라도 없어질 현우 같아, 그의 어깨를 거세게 붙들고 타액을 나누었다. 스르르, 이부자리로 현우가 천천히 눕혀졌다. 야릇하게 흔들거리는 호롱불 때문에 현우의 표정은 위태로워 보였다. 어색하게 그늘진 현우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싫을리가 있습니까.”
현우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민 의미가 없는, 거진 찢어진 한복을 풀어내고 완연히 드러난 그의 몸에 기함을 토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패인 상처는 아직까지 피가 맺혀 있는 것 같았고 상처가 나 있지 않은 곳은 온통 순흔이었다. 다리 사이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연한 허벅지 사이는 누군가의 불쾌한 취미로 담배 자국이 분명한 상처투성이였다. 현무의 상징이 새겨진 등에는 더했다. 악질적으로 잡아 뜯겨진 상처들이 가득했다. 피냄새가 날 것만 같은 등.
“당신은 바봅니까? 이런 걸 다 당하고만 있었습니까?”
차오르는 분노와 욕정에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으로 고개를 떨궜다. 시체보다 참혹한 그의 몸에 욕정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이렇게 그를 망친 본가에 대해 분노했다. 현우의 가슴팍에 열 오른 이마를 대고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한참 후에 조심스럽게 현우의 마른 손이 내 머리로 올라와 쓰다듬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 말에 겨우 고개를 들어 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우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내 볼과 머리칼을 어질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사람끼리 해야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요.공자가 그래서 화가 난 것이면.”
현우가 바들바들 떨리는 내 입술에 손가락을 얹었다. 지독히도 색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지금부터는 공자랑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공자가 제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현우의 낮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내 이성을 자르기에 충분했고, 더 이상 생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입을 열어 타액을 나누고, 턱으로 내려 목과 턱에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애무를 하려 가슴팍에 손을 얹었지만 손이 스치는 모든 곳에는 상처투성이였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상처 가득한 죽음으로 나아가며 나를 가졌다.
위태롭게 나를 내려다보는 현우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손을 들어 현우의 눈을 가렸다. 당황한 현우의 눈이 내 손바닥 아래에서 깜작거렸다. 속눈썹이 간지럽게 손바닥에 걸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를 마주 대할 정도로 뻔뻔해 지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하는 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마세요. 제가 하는 말만 듣고, 제가 보여주는 것만 보세요.”
“….”
“앞으로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알겠죠? 하고 대답을 종용하자 현우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린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공자가…가려주세요.”
그리고 꽉, 자신의 눈을 향해 내 손바닥을 눌렀다. 보드라운 속눈썹이 손바닥을 찔렀다.
5
“아직 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호출한 남자는 여전히 뱀처럼 혀를 놀렸다.
“이미 가주가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정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무얼요. 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삼켰다.
“무어긴요, 자신의 후임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현무 가를, 위해서요.”
부러 '현무 가'에 힘을 주어 말한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
“그러나 어쩝니까. 그는 후임을 낳을 때까지 제 몫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제 몫을 다했으니 죽어야지요.”
“…죽는다니요.”
“그는 그 역할을 위해서만 살아있는 겁니다, 가주.”
그리곤 사뭇 냉정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숴버리고 싶은 가면 아래서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현무 가의 가주는 현무 가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 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현무 가가, 가주를 따라야겠지요.”
분노를 꾸역꾸역 밀어 넣은 대답에 남자는 말없이 웃고 목례만 했다.
“그럼 후임을 낳기 위한 과정은 모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지 남자가 멍청히 대꾸했다.
“이왕이면 우수한 씨를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현무 가를 위해서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자 남자가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
“헉,하읏-아,현오 공자, 아파,아파요….”
“쉬이….”
거칠게 몰아붙인 현우의 입에서 비명 섞인 신음이 터졌다. 야하게 찡그려진 이마에 촉, 하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지만 펴질 줄을 몰랐다. 그의 몸 안에서 부풀대로 부푼 성기가 터질 듯 아파왔다. 잔뜩 긴장해 힘을 주고 있는 현우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손으로 쓸어내려 긴장을 풀어주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꼭 처녀를 강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파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배덕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의 아버지와 몸을 섞는 아들이라, 세상 어디에도 없을 부정이고 효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픈-윽,읏..!”
숱하게 당해왔을 강간이면서도 현우는 몸을 섞을 때마다 서럽게도 울었다. 처녀 흉내를 내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울음은 정복욕과 파괴욕을 부추기에 충분했다.
“흣-읍, 윽..!”
현우의 몸을 돌려 엉덩이를 붙잡고 천천히, 그리고 깊게 몸을 눌러 넣었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나를 받아들이느라 현우의 입에서는 헉, 하고 거센 숨이 터졌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타하는 쾌락에 입술을 깨물었다. 멋대로, 광폭하게 움직이고 싶은 것을 참고 천천히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아예 뺄 것처럼 주욱 몸을 내었다가 다시 허리를 누르고 집어넣었다. 천천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현우의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흐응, 흣-아,아!”
몸을 넣고 뺄 때마다 주루룩 하고 현우의 새빨간 내벽이 잡아먹을 것처럼 딸려 나왔다. 미칠 것 같은 색정이었다. 창녀보다 더하게 비틀어지는 현우의 허리를 억지로 꽉 눌렀다. 깊게 패인 상처로 가득한 등이 야하게 휘어졌다. 일부러 깊은 상처만 골라서 이를 박고 애무하자 악-하고 비명이 터졌다. 아픔에 풀린 내벽을 틈타 잔인하고 깊게 쳐올렸다.
“깊-깊어요, 그만, 하앗….”
성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으면서도, 섹스에 대한 교육을 단단히 받았던지 현우는 천박한 말을 잘 골라서 할 줄 알았다.
“그만할까요?”
거친 숨을 누르며 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눈물로 젖은 볼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하자 현우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심술궂은 마음에 성기를 반 쯤 빼고 나를 마주 보도록 현우의 몸을 돌렸다. 내벽 안에서 성기가 거칠게 스치는 느낌에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비슷한 표정을 짓는 현우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순진한 성욕은 무섭고 거칠 것이 없다.
“어떻게…해 줄까요.”
현우를, 내 아버지를, 내 다정한 사람을 이렇게 만든 현무 가가 증오스러우면서도 그들에게서 배운 현우의 음란한 말을 기대하는 자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찢어질…때까지, 해주세요….”
현우의 바스러질 것 같은 표정과 한숨 섞인 말투에 달려들 듯 입을 허겁지겁 맞추고, 헐거워져 있던 성기를 급하게 밀어 넣었다. 악, 하고 귓가에서 현우의 비명이 내질러졌다. 그 다음으로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
“현우 공자.”
“네.”
졸린 지 겨우 대답하는 현우의 이마에 입술을 묻은 채 어눌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도망갈까요?”
“…네?”
“아무도 모르는 곳에…둘만 가서 살까요? 아침에는 같이 일어나서 산책도 하고, 맛있는 속세 음식도 먹고, 저녁에는 같이 잠들기 전에 달도 보고, 가끔은 시장에도 가고. 내가 글 읽는 것도 알려줄게요.”
내 말에 현우는 입술을 몇 번 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현우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자 그제서야 현우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현오 공자,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몸이 아닙니까.”
나는 서글피 휘어지는 현우의 눈썹으로 입술을 내렸다. 어쩜 이리 겁이 많을까, 내 다정한 사람.
“제가…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으라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 다 가려줄게요.”
그 말에 현우의 눈이 감겼다. 감은 현우의 눈 위로 입술을 내리고. 쭉 뻗은 콧대와 볼을 거쳐 입술까지 내렸다. 키스도 아닌, 그저 접촉을 하고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다, 가려주고 막아줄게요.”
여전히 대답이 없는 현우의,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춰 내려갔다.
“현오 공자.”
“매일 밤 달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갑시다.”
가슴팍에 쪽쪽 일부러 소리 내서 입을 맞추고 이불을 걷어 올렸다. 섹스 후의 나른함으로 이불 위로 널브러진 현우의 팔다리는 시체처럼 힘이 없었다. 현우가 추울 새라 이불을 상체에 잔뜩 덮어주고, 드러난 현우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제대로 가지 못한 현우를 위한 서비스였다. 입에 그의 것을 담자마자 현우의 허리가 왼쪽으로 휘었다. 현우의 골반을 꽉 눌러 잡고 천천히 일어서는 현우의 성기를 정성껏 애무했다. 질척한 소리만 어두운 방 안에 맴돌았다. 현우가 내 머리칼에 손을 올리고 흐응, 하고 비음 섞인 신음을 계속 토해냈다.
“나, 나와요.. 현오 공-읏,흣..!”
밀어내려는 현우의 손을 잡아 옆으로 누르고는 번들거리는 귀두에 일부러 이를 스치자 현우가 몸을 떨며 사정했다.
“대답해요.”
“공자….”
사정 후 밀려오는 나른함에 현우가 눈을 느릿느릿 떴다.
“도망…가요.”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현우는 내 머리에 올린 손을 채 치우지도 못하고 잠들었다. 죽음과 밤이 그를 덮쳤다. 천천히 절벽으로 미끄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소서.
차오르는 눈물이 낯설었다.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는 현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믿지도 않던 신을 찾았다.
**
그 날 이후, 하루의 끝은 언제나 현우가 머무르는 안채로 와서, 어수룩하게 잠이 든 현우를 품에 안고 그가 완전한 잠의 늪으로 빠져들 때까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현우는 끝이 흐려지는 발음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잠으로 빨려 들어갔다. 편하게 잠드는 것이 오랜만이라며 힘없는 웃는 현우에게서 그의 지난 세월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옷깃을 절박하게 쥔 마른 손등에 까지도 흉터투성이인 것을 보고 깊은 한숨을 속으로만 삼켰다.
-내가 당신을 증오하고 그리워하던 그 세월 동안 당신은 누군가를 증오할 힘마저 잃어버리고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지.
현우와 나의 운명을 이토록 시궁창까지 몰아넣은 현무 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현우의 등에 새겨진 현무의 색깔을 빼앗아 만들어진 더럽고 추악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현우를 잔뜩 거친 사포로 마모시켜 돌덩이로 만들어 놓았다. 어설피 잠이 든 현우의, 곱게 땋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상아색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난 약속했습니다.”
목적어조차 없는 문장에 현우는 거의 감겼던 눈을 뜨고 살풋 웃었다. 눈가에 얇은 주름이 잡히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나는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일…밤, 달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신다고 하셨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오 공자.”
현우는 잠기운에 취해 풀린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단단한 손가락으로 내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눌렀다.
“나는 현오 공자를 믿어요. 현오 공자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을 겁니다. 대신….”
미간에서 손을 떼고 약간 고개를 들어 입술과 인중 중간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키스라고 볼 수도 없는,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접촉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현오 공자는 매일 밤 나를 보러 와서, 내 앞에서 웃어주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아요. 그게 제 전부에요.”
그리고선 수줍게 입술을 떼고, 내 안으로 파고드는 현우는 미칠 듯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6
'현우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치 않겠다' 하고 공개적으로 집안 전체에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자, 분위기는 묘해졌다.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얼마나 나를 배덕한 인간으로 보고 있을지는 신물이 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배덕은 너무나 진하게 내 몸에 배어 있어, 굳이 그 색깔을 다시 찾을 이유도 없었다. 또한 나는 그렇게 물들여진 색깔이 만족스러웠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나는 그저 현우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따지고, 그 죄책감에 나를 묻는 것에는 이미 지쳐버렸다. 그보다는 현우의 눈을 쳐다보고, 그와 입을 맞추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와 몸을 섞는 것은 더더욱 좋았고, 그와 함께 잠이 들고, 공간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매일같이 현우와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현무 가를 불태워 없애고, 현우와 달이 잘 보이는 곳으로 도망갈 계획을 몇 십번이고 되풀이했다. 현우의 보드라운 볼에 흐르는 달빛을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족했다.
“가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건성으로 서류를 훑으며 손짓하자 남자는 머뭇거리는 척 연기하다 입을 열었다.
"가주의 쓰레-현우에 대한 처우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또 그 소리, 지겨운 마음에 서류를 덮고 남자를 응시했다. 게다가 일부러 '쓰레기' 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보란 듯이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덮었는데도 남자의 얼굴에는 웃음만 어룽어룽 떠 있었다. 교활한 웃음을 짓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쎄요, 가령… 좋은 명기를 가주가 독차지 하고 있다거나.”
음탕한 말에 서류철 위에 올려진 손바닥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직도 현우를 그렇게 말할 참이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가주.”
“나가세요.”
“가주, 제가,”
“꺼지라고!!”
고함을 지르며 쾅, 책상을 쳤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어깨가 떨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가주,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현무 가에서는 가주가 현무를 따라야 합니다. 가주를 따르는 현무 가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나는.”
“게다가, 그는 당신의 아버지 아닙니까? 지금 당신이 그에게 하는 행동은 아무리 봐도 효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는.”
“가주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위험해 지는 쪽은 과연 어느 쪽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좋은-머리로 말이죠.”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는 나갔다. 머리가 깨질 듯이 두통이 밀려왔다. 어쩌다 이런, 매독 같은 운명에 걸려 죽어가게 된 것일까. 밀려오는 자괴감에 뜨끈뜨끈 달아오른 머리를 감싸고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쿵,쿵 느리게 박던 머리를 더 빠르고 세게 처박으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할 수가 없었다. 하도 박아 시야가 뿌옇게 변할 때까지 나는 울었다. 유약한 나의 정신이 그 무엇보다 두렵고 무서웠다. 도피처가 필요했다.
***
“현오 공자!”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안채의 문을 즐거이 웃으며 연 현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언제나 상처를 보고 놀라는 쪽은 내 쪽이었는데, 오늘은 반대의 상황이다. 사색이 된 현우가 손을 답싹 쥐어 방 안으로 끌었다. 하긴 이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퍼렇게 이마 한 가운데에 피멍이 들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어찌, 어찌 이렇게…다치셨습니까?”
안타까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현우의 목소리에 왠지 우월감을 느꼈다. 넘어졌습니다. 되도 않는 변명으로 얼버무리면서 멍하니 현우가 하는 대로 따랐다. 현우가 앉히는 대로 앉고, 현우가 발라주는 대로 약을 바르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손길. 어릴 적의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일지 정말로 궁금했다. 듬직하고, 멋진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난 내 아버지는, 내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에 무한한 저주를 퍼붓게 만들었다. 우리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피를 나눈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닮아 있는 생김새는 나를 더욱이 옭아매었다. 그것을 억지로 잡아 뜯으며 그에게 품은 감정은 감히 정의조차 내릴 수 없었고, 더욱이 그조차도 지킬 수 없는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덫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것은 올가미처럼 나를 갈수록 집어삼켰다. 언젠가는 내가 발목을 자르고 달아나던지, 사냥꾼에 잡혀 죽던지 하나가 될 것이었다. 복잡하게 피어오르는 생각에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제가 하자는 대로만 잠자코 따르니 현우가 정말로 걱정이 되었는지 손을 내 이마 위에 얹었다. 이마에 얹어진 현우의 손이 차갑게 느껴지는 걸 보아, 열이 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오 공자,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힘없이 웃으며 현우의 손목을 쥐어 앉혔다.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의 까만 눈동자 안에 비치는 내가 보였다.
“현오 공자… 정말 아파 보이는데.”
“네, 저 아파요.”
아파요? 하고 뒷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걱정에 눈을 크게 뜬 현우가 귀여워 그의 볼을 감싸 안고 쪽쪽, 새처럼 키스를 했다. 몸을 들끓는 자기혐오를 잠시 잠재우기로 했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괜찮아요.”
"키스할까요?"
느릿한 말투에 현우가 얼굴을 붉혔다. 왠지 평소보다 야릇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현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치고 입술을 마주 대했다. 차를 마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쌉싸름하고 촉촉했다. 현우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아주 정중하게 타액을 나누었다. 무언가 대단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절박하게 키스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당신과 영원히 살고 싶어.
눈물이 날 것처럼 눈 뒷쪽이 아릿하게 뜨거워졌다. 자연스레 현우의 한복 옷고름을 풀었다. 수수한 남색 비단 한복에 끝에만 노란색으로 나비가 수놓아져 있었다.
“한복…예쁜 거 입었네요.”
별 의미 없는 칭찬에도 현우는 볼을 붉게 물들였다. 나의 행동, 말투 하나하나 솔직하게 반응하는 현우가 좋았다. 모든 상식이 결여된 현우는 어떠한 여과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행동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으로 당신이 좋다-라고 온몸으로 표출했다. 거짓과 위선만이 가득한 현무에서 단 하나 빛나는 호롱불이었다. 드러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흣-하고 숨을 참는 신음이 울렸다. 현우를 편히 이부자리에 눕혔다. 비단이 사르락 거리는 소리마저 야릇하다고 생각했다. 현우의 가슴팍을 약간 아프도록 이를 세워 물면서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하,앗-아파요..아파,현오 공자….”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현우의 성기를 쥐니 곧 자지러지는 신음으로 변했다. 순진한 성욕이 새파랗게 날을 세웠다. 몇 번 스치지도 않았는데 현우의 성기가 배에 닿을 듯 발기했다.
“흐읏,흡-빠,빨리..”
“나는…현우 공자가 스스로 하는 게 보고 싶어요.”
내 어깨를 잡고 안달하는 현우가 귀여워 그의 성기에서 손을 떼니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에 당혹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현우야. 내 앞에서 자위해 볼래?”
처음으로 뱉은 반토막 난 나의 말에 현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싹한 배덕이 몸을 삼켰다. 현우가 한참을 머뭇거리길래, 답답해져 그의 손을 끌고 와 직접 성기 위로 얹어주었다.
“응, 해 봐.”
현우가 흥분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눈에 눈물을 부옇게 매달았다. 천천히 자신의 것을 문지르는 어린 손이 귀여워 귓가와 가슴팍에 쉴새없이 키스의 비를 뿌렸다.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빨리 해 봐요, 느리게-세게-꼬집기도 하고. 금세 헉헉 차오르는 숨을 뱉으며 사정한 현우가 힘이 빠지는지 팔을 흐트러뜨렸다. 허벅지에 흩뿌려진 정액을 훑어 뒤를 풀어주려 손을 가져갔다.
“현오 공자는…못됐어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 웃음을 흘렸다. 느릿느릿 풀어진 그의 구멍에 나를 밀어 넣었다. 아흑-하고 카랑카랑한 신음이 울렸다. 기분 좋은 압박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익숙하게 내 허리를 감싸 안는 현우의 다리에 몸서리를 쳤다. 미칠 것만 같은 흥분감과 배덕에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현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잔인할 정도로 깊게 쳐올렸다 뺐다.
“아,학,현오,현오 공자-천, 천천히..!”
어두운 방 안에 더러운 욕망에 가득 찬 헉헉 거리는 신음 섞인 한숨만 가득했다. 현우의 얼굴을 장님처럼 미친 듯이 더듬었다. 푹 꺼진 눈, 높은 콧대, 시원스레 웃는 입과 보드라운 볼. 성급하게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나의 손을 당황한 현우가 쥐려 했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왜…나를 낳았습니까.”
흥분에 잔뜩 잠겨가는 목소리를 겨우 뱉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묻고 싶던 말이었다. 허리를 비틀어 박자 현우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면서 눈을 반쯤 감았다. 파도처럼 밀어닥친 성적 흥분에 현우는 내 말을 쫓아오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데에 벅차서 대답 없이 숨을 거칠게 쉬기만 했다. 내 아래에서 야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을 뱉는 그가, 내 아버지가, 현우가, 미치도록 미웠다. 약하게 꿈틀대는, 가는 팔다리와 밭은 숨 때문에 달아오른 발그스름한 뺨, 무엇 하나 곱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현우가 숨소리를 색색 거리며 머리를 도리질 쳤다. 고급스러운 비단 이불에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시체처럼 흩어졌다.
“대답..대답해.”
“하응,핫-..현..현오.”
자신의 이름만 애달픈 목소리로 부르는 그가 미웠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왜 나를 낳았나. 당신은 왜 현무가에서 나를 낳아 나를 만났는가. 마음껏 사랑할 수도 없는데 왜 나를 만나서, 왜 나를-!
“당신 같은 거..정말 싫어….”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물이 찼다. 현우의 잔뜩 찡그린 얼굴이 눈물 때문에 흐릿해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현우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거세게 성기를 박아 넣으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현우의 볼에 내 눈물이 툭툭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천천히 현우의 목을 조른 손에 힘을 주었다. 현우가 바르작거리며 내 팔을 쳤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목이 졸리는 사람 치고 평화로운 그의 얼굴에 나는 그를 죽일 의욕조차 잃었다.
“정말…싫어….”
결국 현우의 안에 사정하고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아이처럼 울었다. 현우의 목을 조르던 손은 이미 힘이 풀려진 지 오래였다. 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떨리는 손만 뻗어 그의 눈을 겨우 가렸다. 내가 지켜주겠다며, 허세 아닌 허세를 부렸던 날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도 울었는지 손바닥에 닿는 눈이 잔뜩 축축했다. 비에 젖은 낙엽 같은 속눈썹이 손바닥에 거슬렸다.
“저도 제가 싫으니…공평한 셈이네요, 현오 공자.”
목을 졸려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 현우가 내가 고백한 그 날처럼, 나의 손바닥을 제 눈 위로 깊게 눌렀다.
“…당신 같은 거 정말…죽어버렸음 좋겠어….”
“….”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내 손바닥을 누르던 손을 떼었다. 툭, 이불에 떨어진 손은 마치 시체 같았다. 나는 그 손을 다시 잡아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누구를 향한 울음인지도 몰랐다. 그가 언젠가 없어질 날을 상상하며 나는 울었다. 내가 그에게 얼굴을 파묻고 우는 동안, 평소처럼 나에게 용서를 주는 그의 세례 같던 손은 다시 나에게 얹어지지 않았다. 섹스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의 가슴팍이 차가워지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심장 박동수가 느려질 때까지 밤을 새워 울었는데도 말이다.
7
꿈에서 나는 미친 듯이 현우를 쫓고 있었다. 현우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현우의 작은 발이 종종 거리는 보폭은 크지 않은데 나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현우가 뒷걸음질 치는 뒷편에는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
“현우, 현우 공자!! 멈춰요, 멈….”
현우는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손을 앞으로 뻗고 등을 뒤로 내려 놓으려 했다. 나는 사색이 되어 현우에게로 달려갔다. 몸의 반이 거진 넘어가고 나서야 겨우 잡은 현우의 손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어디…어디 가요.”
현우의 손을 잡고 내가 겨우 한 말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했다.
“현오 공자가 저 싫다고 하셨잖아요.”
현우는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끌어당겨 ,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농담이에요. 현오 공자가 누구보다도 날 사랑하는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현우는 내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비틀어 빼려 힘을 주었다. 뒤로 넘어가려 하는 현우를, 나는 도리질 치며 잡으려 애썼다. 현우는 고개를 넘겨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에는 검은 물이 험하게 넘실대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는 것도,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도. 나는 이제 쉬고 싶어요. 저 강을 건너면 모든 것을 잊을 거예요.”
현우의 표정은 퍽 서글프고 진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입술을 붙였다 떼였다만 반복했다. 현우는 나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천천히 들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현우의 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현우….”
“현오 공자는 내 아들이니까, 알 수 있어요.”
현우의 말에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늘어지고 오직 현우의 얼굴만 또렷했다. 현우는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세게 나를 뿌리치고 검은 물로 떨어졌다. 검은 한복이 내 시야에서 나부꼈다. 안 돼, 안 돼, 하고 절벽으로 미친 듯이 기어갔다. 부들부들 무릎이 꺾이고 떨렸다. 현우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지만 검은 천 사이에 얼굴이 가려져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첨벙-하고 맥없이 현우가 검은 물 사이로 가라앉았다.
죽음으로 잠긴 그는 다시 떠오르지도 않았다.
“안 돼-!”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껌뻑거리며 일어났다. 눈에는 불쾌하게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 아-으, 으.….”
현우, 현우.. 현우.. 고장난 라디오처럼 계속해서 그의 이름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당장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님을.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차가운 바닥에 인상을 찌푸릴 새도 없이 현우의 처소로 미친 듯 달려갔다. 자꾸만 고꾸라지는 허리와 꺾이는 무릎, 고이는 눈물에 숨이 차올랐다.
“현, 현우….”
그의 방문을 벌컥 열고, 그의 이름을 발작처럼 불렀다. 온통 어두운 방은 조용하고 싸늘했다. 몇 시간 전까지 미친 듯 정사를 벌였던 곳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치 냉기만 감돌았다.
“…현우 공자.”
조심스레 휘장을 걷어 올리고, 방문으로 발을 들이는데 현우가 누워 있어야 할 이부자리는 조금 구겨진 이불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뭐지, 하고 몸을 옆으로 돌리는데 무언가 이마에 부딪혔다. 싸늘하고 낯선 촉감에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니..아니야...아니, 아닌데….”
눈물조차 나지 않는데 눈앞이 그대로 뿌옇게 달아올랐다. 나의 이마를 친 것은 굳어진 현우의 발이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부정의 말을 하며 현우의 발 아래에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꿇어 앉았다.
“현우…으흐…으,안 돼..으….”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고개를 박자 그제서야 터지는 울음에 나는 내가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죽은 현우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현우의 좁은 방 안에 내 질척이는 울음만 가득했다.
“아니…아닌데…. 내가 달을 보여주러 가야 하는데… 아…현우, 현우.….”
쾅, 쾅 자책감에 딱딱한 바닥에 미친 듯이 고개를 쳐박았다. 한참을 그러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현우의 목을 조르는 밧줄을 풀어내려 하는데, 현우의 다리 새로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에 웅덩이가 생긴 것을 알아챘다. 경악에 찬 눈으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아이. 그의 아이.
나는 엎어져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고인 피를 쓸었다. 약간의 액체로 변해버린 그의 마지막 생명, 치미는 분노와 절망에 그것에서 눈을 돌리고 현우의 목에 감겨 있는 밧줄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풀어냈다. 쿠당-하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현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엎어진, 인형 같은 현우의 시체를 돌려 눕히고, 현우의 푹 꺼진 배에 고개를 묻고 울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어쩜 이렇게 잔인합니까….”
현우의 검은 한복은 아무리 눈물을 먹어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
“잔인한 사람…흐으….흐…으읍….”
현우의 시체가 자꾸만 싸늘해지는 게 싫었다.
내 앞에서 지어주던 미소가 여전히 따뜻하게 햇빛처럼 빛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더러운 버러지 소굴로 기어들어왔는데.
“…아버지, 내 아버지….”
울음 때문에 잔뜩 먹힌 목소리를 겨우 내어,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했던 그의 제대로 된 호칭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인생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연결고리가 끊겨 버렸다. 나를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던 줄들이 끊어지자 모든 관절이 꺾이고 뼈가 부서져 내렸다.
내 사랑하는 사람, 내 아버지.
현우의 차가운 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현우를 볼 자신이 없는 내가 그 와중에도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하도 울어 지끈거리는 머리와 부옇게 변한 시야에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자꾸만 정신이 흐려졌다. 만약 이게 죽음의 과정이라면, 꽤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잠, 끝없는 잠.
***
현우가 자살하고 난 후 일주일 동안, 나에게 정상적인 생활이란 없었다. 그저 하라는 일과를 마치면 시체처럼 현우의 처소에 가, 아직까지 색이 빠지지 않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현우와 나의 마지막 생명의 피를 먹고 불그스름하게 변해버린 불쾌한 바닥 때문에 현우의 처소를 불태우자는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것을 묵살해버렸다. 연결 고리는 이미 끊어졌지만 그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나의 발악이었고, 그곳만큼 나를 편안하게 하는 장소는 없었다. 이불도 없는 바닥에 드러누워 입술 새에 담배를 물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딸깍.
희끄무레한 불빛이 맥없이 켜졌다 꺼졌다. 가스가 다 되어 가는 모양이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다시 한 번 눌렀다.
딸깍, 딸깍.
가스 냄새가 진하게 나고 불 때문에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 졌다. 눈 앞에서 뜨거움이 확 달아오르는 광경은 언제 봐도 신비했다.
“당신은 평생 추웠는데.”
별 생각 없이 지껄이며 다시 라이터를 눌렀다.
-그러게요.
익숙한,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에 옆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는 현우가, 내가 알던 그 자가, 내 아버지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손에는 내가 언젠가 사다 준 비눗방울을 들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는 태평한 얼굴로 후우-하고 비눗방울을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이거, 꿈이에요?..”
-글쎄요.
한참만에 내가 겨우 뱉은 말에 현우가 내 쪽으로 돌아 누우며 베시시 웃었다. 입꼬리와 눈꼬리가 만날 것처럼 휘어지는 그 웃음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현우와 나 사이에 그가 불어 낸 영롱한 비눗방울이 맴돌다가 톡,톡 맥없이 터졌다. 눈이 따끔따끔해졌다. 그는 예전처럼, 손을 들어 내 앞의 막을 거둬 주었다.
“진짜야…?”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현우를 만지려 하다가, 그가 가짜여서 사라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그러자 현우가 더 진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맞췄다. 차가운 손의 온도에 몸이 찌릿해졌다. 나와 그 사이에 있던 마지막 비눗방울마저 터졌다. 나보다 조금 작은 손이 내 손에 맞춰졌다.
여전히 차가운 손.
“보고…보고 싶었어요….”
미칠 듯이 그리웠던 접촉에 내가 펑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자 현우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머지 손을 들어 내 손등을 잡았다.
“…왜…왜….흐으…으….”
내가 꺽꺽대며 숨을 들이키자 현우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달 보러 가요.
그리곤 물처럼 부드럽게 손짓했다. 라이터가 바닥에 떨궈졌다. 대번에 화르륵 불빛이 솟았다.
“으, 흐..미안…미안해요…내가….”
-뭐가 미안해요. 이제 약속 지키면 되잖아요. 달 보러 간다고 한 약속.
현우는 여전히 자애로웠다. 돌아온 내 성모 마리아. 현우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맥없이 늘어져 있던 몸이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한 뼘 정도 아래서 현우는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내 손을 들어 제 눈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이제 공자가 보여주는 것만 볼 거예요.
“…현우…”
눈물이 미친 듯 쏟아져 현우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애써 눈을 세게 깜빡여 눈물을 떨궈냈다. 모든 걸 기억하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현우를 훑었다.
내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현우의 속눈썹, 내 손을 눌러 잡은 현우의 손길, 일렁이는 현우의 머리카락.
-이제, 나한테 뭘 보여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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